Running/Excellent Maker2012.02.03 03:00

[Runday] 김양수의 <윤호와 나, 그리고 달리기> 제2화. 니가 내 마음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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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안 먹고 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공부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당시의 나는 PC통신에 급격하게 빠져들기 시작했고, ‘번개’라는 이름 아래 고교생인 신분인 채로 신촌에 나가 대학생 형, 누나들과 어울리며 어른 흉내 내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 중인 여자 친구도 하나 생겼고,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단지 친구인 여고생들’도 몇 명이나 생겼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이제 시작이다 싶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친구인 여자애’가 10명을 돌파했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나 여자친구가 다섯 명도 넘는다?’라며 자랑삼아 떠벌리기도 했다. 뭐, 단어순서만 앞뒤로 하나 바꾼 것뿐이니까 그리 큰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같은 반이 된 윤호는 나의 이런 일신상의 변화에 크게 기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조용히 애니메이션 잡지를 읽거나 학교를 마치고 오락실에 앉아서 게임에 매진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안 친하지도, 친하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친구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에게 묘한 연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눈이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기도 하고,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만화잡지도 몇 권쯤 빌려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잡지를 펼쳐보지도, 오락실에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은 여친이랑 뽀뽀도 제대로 한 번 못해본 주제에.


가을이 왔다. 본격적인 입시 준비가 시작됐고, 그 첫 번째 포문은 체력장이었다. 어디 하나 이상이 있지 않는 한은 어느 누구라도 만점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과목. 하지만 소년들의 관심사는 만점이 아니라 마지막 ‘1천미터 오래달리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였다. 왜냐하면 체력장의 맨 끝 차례인 오래 달리기는 그 앞의 종목-멀리뛰기, 턱걸이, 던지기 등등-에서 일정 이상 점수를 받으면 하지 않아도 만점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만점을 받고 하교해버렸는데, 가을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뙤약볕이 이글대는 텅 빈 운동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굴욕 중의 굴욕이었다. 남자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운동을 못 한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차라리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슬프게도 윤호는 그 오래달리기를 뛰어야하는 교내의 몇 안 되는 소년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나도 아마 내 실력대로 체력장에 임했다면 분명 그 오래 달리기에 참여해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운동을 못하는 대신 수완이 좋은 녀석이었다. 교우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아 어 반에서 힘 좋은 녀석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왔는데, 그 덕분에 체력장에서 내가 가장 취약했던 종목인 던지기는 우리 반에서 던지기를 제일 잘 하는 녀석이 내 번호표를 대신 가슴에 달고 해결해주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범법행위이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몇몇 던지기 잘 하는 녀석이 반 아이들 전체의 던지기를 해결해줄 만큼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수완과는 거리가 멀었고 ‘교우관계’라는 말과 가장 거리가 먼 윤호는 그마저도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윤호를 도와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내 축배를 들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든 건, 오래달리기를 남긴 마지막 종목이 모두 끝나고 아이들이 귀가한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체육복을 벗지도 못한 채 오래달리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 윤호를 보면서였다.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윤호도 어쩐지 입을 닫았다. 무서울 만큼 적막이 흘렀다. 사실 그냥 가방 매고 집에 가버려도 누가 뭐라할 수 없을 정도로 윤호와 나는 이미 다시 대면대면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 순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년 전 절친한 짝꿍 상태로 돌아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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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하지?


침을 꿀꺽 삼키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려줄까?” 녀석은 그 말에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교실을 쩌렁 울렸던 소리. “니가 내 마음을 알아?” 그게 다였다. 녀석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급격하게 얼어갔다. 아니, 이미 오랫동안 얼려 있었던 것을 단숨에 확인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만화나 영화라면 나는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함께 오래달리기를 하며 결승점에서 함께 부둥켜안고 우리의 우정을 평생 지키자고 약속했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는 매몰차게 집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그와 함께 뛰어주진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엔 때로 그런 이유가 가장 설득력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체력장을 치르는 수많은 학생들로 바글바글대는 운동장에는 이제 1반부터 15반까지 통틀어 오래달리기를 해야 하는 소년들이 대략 12명 정도가 출발점에 서 있었다. 너무 뚱뚱한 녀석, 너무 마른 녀석, 너무 키가 작은 녀석 등 설명을 하려면 ‘너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참 멀쩡해보였던 윤호는 평소의 표정과는 달리 꼭 1등이라도 하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출발. 윤호는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녀석의 발이 저렇게 빨랐던가 싶을 정도로 윤호는 쭉쭉 나아갔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윤호가 이렇게 달리기를 잘 했던가 하며 놀라기보다는, 무척 화가 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뛰고 있는 윤호를 바라보는 것이 어쩐지 힘들다고 느낄 정도로.


그리고 약 반 정도를 달렸을 즈음부터 윤호의 스테미너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로 달려 나가던 윤호의 악다문 입은 어느덧 헉헉대는 소리를 내며 헐떡이기 바빴고, 윤호의 다리는 슬로우 비디오를 걸어놓은 것처럼 느리고, 또 느렸다. 2등, 4등, 5등… 기어이 8등으로 결승점에 도착할 때는 그나마 꼴찌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윤호의 후반 페이스는 엉망이었다. 뭐, 다행히 그래도 완주했으므로 윤호의 체력장 종합점수는 만점이겠지만, 윤호의 기분은 아마 20점 정도도 되지 못해보였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헉헉대며 운동장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윤호를 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본관 계단에 서 있었다. 그리고 윤호는 한참을 거친 숨을 추스르더니 나를 흘끔 바라보곤 이내 옷을 갈아입으러 교실로 들어갔다. ‘윤호야, 그래도 잘 했다. 만점 축하한다.’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 하다가 그마저도 어쩐지 어색하고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다. 그렇다. 그 시절엔 그런 이유가 내 자신에게 가장 설득력 있다.


“일본에 가려고.”
대학입시를 마치고, 아직 합격 발표가 나지 않았던 늦겨울의 어느날, 오락실에서 우연히 만난 윤호는 그렇게 한마디 했다. 녀석은 입시 결과 자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았다. 녀석은 처음부터 우리완 뭔가 좀 달랐으니까. “…애니메이션 공부하러 가는 거야?”, “아니, <스트리트 파이터 2> 때문에.” 황당했다. 게임 때문에 일본에 간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 게임의 본고장인 일본에 가서 고수와 한 판 붙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런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걸까? 물어봤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 원래 이 녀석의 특기는 한마디만 하고 그 다음의 말을 절대로 잇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녀석은 끝까지 ‘일본에 가는 정확한 이유’는 함구한 채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18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지금 저 앞에서 까만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 녀석이 바로 윤호였다. 놀라울 만큼 달라진 게 없었다.


“너 누구누구 맞지?” 같은 대사는 없었다. 너무나 확실한 윤호였으니까.
여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동생의 결혼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 친구 결혼식 다음 타자가 바로 윤호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우연이라면 별 거 아닌 우연이다. 그리곤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너, 일본에서 지내지 않았어?” 그러자 윤호는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는다. “잠깐 갔었지.” 그리곤 또 대화가 끊겼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시끌벅적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어쩐지 윤호도 식장에 들어가봐야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일행들이 가자고 저 쪽에서 손짓을 했다. 어쩐지 18년만의 만남이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다. “윤호야, 나 만화가 됐다?” 엉뚱하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윤호는 깜짝 놀라는 듯했다. 그런 말은 윤호의 입에서 나와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놀라는 표정은 지었지만 결코 “정말?” 혹은 “진짜?”, “제목이 뭔데?” 같은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윤호는 윤호였다.


이제 정말 가야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녀석도 악수를 했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명함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명함은 가져오지도 않았고, 핸드폰을 꺼내 서로의 이름을 저장할 만큼 달큰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랑 연락하고 싶으면, 아마 검색해서 날 찾겠지, 정도로 이 상황을 합리화했다.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능숙해진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럼 나 갈게.”, “응, 또 보자.” 우리는 그렇게 또 보기 위한 일말의 노력도 없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곤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뒤돌아 식장으로 돌아가려는 윤호를 불러 세웠다. “윤호야!”, “응?”, “스파는 아직 하냐?” 윤호가 멍히 날 쳐다봤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옛 추억들이 떠오르는 듯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곤 말했다. “가끔.” 그리곤 윤호가 웃었다.
 

어쩐지 윤호가 활짝 웃는 얼굴은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글과 그림 /김양수(만화가 & 칼럼니스트)


김양수의 <윤호와 나, 그리고 달리기>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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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로 맺어졌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로 인해(당시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까요?) 결국 급격히 얼어버린 묘한 우정. 그리고 그 이후의 우연한 만남.
 

중고등학교를 추억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한 장면 아닐까요? 그 당시에는 이 친구 없으면 죽고 못산다고 생각하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노는물(?)이 틀려지면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해야하나 말하야 하나 고민하게 되지요. 그 시절, 그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소년 김양수군의 이야기로 잠시 추억의 돌기를 어루어만져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양수님께는 뉴발란스 574소닉이 선물로 증정되었습니다.
늘 뉴발란스와 함께하며 해피~고~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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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수 (만화가, 칼럼니스트)
출   생 1973년
데   뷔 1998년 만화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경   력 2005~2009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
           2008.02 네이버 웹툰 '생활의 참견' 연재
           1997~2009 월간 PAPER 기자
대표작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 <김양수의 음악의 재발견>, <시우는 행복해>
저   서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애니북스, 2005년),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한자 만화 교과서>(스콜라, 2007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1>(소담출판사, 2009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2>(소담출판사, 2010년)
사이트  미투데이 http://me2day.net/muplie



 

Posted by NBrun
Running/Excellent Maker2012.02.03 02:12

[Runday] 김양수의 <윤호와 나, 그리고 달리기> 제1화. 사실 난 네가 좋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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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쯤 전,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서른여덟이나 먹어가지고 하는 늦깎이 결혼식이라 안 가면 섭섭해할까봐 열일 제쳐두고 갔는데, 열일 제쳐두고 가길 다행이었다. 영화담당 기자인 친구의 직업 탓에 유명 여배우들의 얼굴을 쏠쏠히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힐끗힐끗 식사를 하는 여배우들의 얼굴이나 쳐다보다가 식이 끝났다. 나와 친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식이 끝나자마자 식장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햐~, 그 여배우 예쁘더라. 영화에선 그렇게 안 예뻤던 것 같은데”, “여배우는 여배우야. 후광이 막~.” 등등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혹시라도 또 아리따운 여배우가 지나갈까 사람들로 가득한 식장 앞 주차장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그 사이에서 굉장히 낯익은 사내의 얼굴이 지나갔다. 어디서 봤더라. 누구더라… 할 것도 없이 단번에 알아챘다.

윤호였다. 조윤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네 친구. 그래, 그 녀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려 19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녀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느낌. 윤호는 날 멍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찡그리며 웃었다. 확실히 그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내가 처음 알고 지내기 시작한 건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중학교 1~2학년 즈음 부터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 세탁소집 아들이었던 윤호는 늘 집 앞 문방구나 동네 오락실에서 마주치는 녀석이었지만 중학생 시절 같은 반이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른다고 할 수도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대면대면한 관계. 대충 듣기로 녀석은 꽤나 일본통이어서 만화나 애니메이션, 일본 음악에 빠져 지낸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었고 당시는 ‘오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므로 윤호가 왕따의 대상으로 주목받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윤호는 윤호일 뿐이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집 앞 독서실에서 오후의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독서실이라는 것이 예의 그렇듯 공부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학교를 파한 동네 친구들의 집합소로서의 역할이 컸다. 우리들은 독서실 휴게실을 아지트삼아 함께 TV도 보고, 몰래 담배도 피우고, 의미 없이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독서실 지하에는 오락실이 있었고, 그 오락실을 먹여 살리는 과반수의 아이들은 독서실의 소년들이었으며, 그 소년들 중에는 윤호도 있었다. 그러니까, 윤호와 내가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건 아마 그쯤부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이 관계의 시작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어쩌면 ‘우리가 본격적으로 알고 지냈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내가 본격적으로 녀석에게 접근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고등학교 2학년인 시절, 혜성처럼 나타난 동네의 스타였으니까. 모든 아이들이 윤호를 추앙까진 아니더라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초중딩들은 모두들 윤호를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그 전까지 ‘감성적 오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을 온 몸으로 보여주며 거의 투명인간에 가까운 무존재감으로 살아가던 이 세탁소집 아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단숨에 우리 동네 실시간 검색어 1위 같은 존재로 등극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윤호는,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게임을 정말 미친 듯이 잘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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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윤호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고수였다.

상대방의 머리 위로 점프하며 순식간에 필살기를 펼쳐 적으로 하여금 주먹 한 방 내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만드는 그 녀석의 기술은, 그래 마치 그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하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손놀림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은 단순히 상대방과 싸워 이기고 지는 대전액션게임을 통해 인간 중에도 신의 영역까지 다다른 인물들은 분명히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단순히 게임 하나 잘 한다고 동네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당시의 분위기는 그랬다. 온 동네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녁밥만 먹으면 오락실로 달려가 줄을 서가며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하며 자웅을 겨루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여섯 개의 버튼을 두드리는 와중에 윤호가 오락실에 들어서면 일순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자기들도 모르게 윤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길을 터주었으며, 이미 내 차례가 오기를 10분 이상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윤호가 게임기 앞에 다가오면 순순히 자리를 양보해주는 아이들마저도 생겨났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윤호에게 그의 필살기를 배우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가끔씩 원정을 오는 다른 동네 <스트리트 파이터 2> 고수에게 맞설 우리 동네 대표선수이기에 나름대로의 예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픽 하고 웃음이 날 일이지만, 그때는 왜인지 참 진지하게 철이 없었다. 당시 우리는 무려 열여덟 살의, 턱에 수염이 보송보송 난 녀석들이었으니까.

“사실 난 네가 좋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어. 중학교 3학년 때 너희 반에 혼자 살던 약간 바보 같은 녀석 있었잖아. 우연히 지나가다가 네가 그 녀석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넌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어."

어느덧 오락실에서의 인연으로 친해져 함께 집까지 오는 사이가 된 윤호가 문득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그 가난하고 바보였던 친구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 다소 낯 뜨거운 멘트는 윤호가 날 진정으로 친구로 받아들이겠다는 어떤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었냐는 내 질문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모호한 미소만을 남겼다.) 그리고 이 선언(?)을 한 날을 기점으로 녀석은 날 급격하게 가깝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하면서 맞은편에 앉은 이름 모를 녀석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있을 때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대신 스틱을 잡고 상대방을 피떡으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자신의 집(엄밀히 말해 세탁소 건물 뒷집)에 날 초대해 그간 자신이 모아둔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와 만화책,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일본 히트곡들이 담겨진 카세트테이프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건 요즘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끄는 노래야. 나도 이 노래 구하려고 명동까지 갔다 왔어. 참고로 말이지, 일본 노래는 좀 비싸더라도 일제 크롬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게 상식이야. 일본 노래는 일본 공테이프에 최적화되어 있거든."

묘하게 비논리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녀석의 진지한 대화들을 들으며, 나도 어느 정도는 녀석이 심취한 일본 문화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건, 녀석의 그림솜씨였다. 녀석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면서 작년에 쓰던 두툼한 국어 교과서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페이지를 화라라락 하면서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서는, ‘메칸더 브이’가 출동하여 무릎에서 상어미사일을 쏘고 있었다. 그렇다. 보통 아이들이 교과서 페이지의 한쪽 끄트머리에 만들던 졸라맨 같은 움직그림을 이 녀석은 당장 TV에 방송시켜도 문제없을 것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난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 녀석도 뿌듯한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녁 먹고 갈래?"

글과 그림 /김양수(만화가 & 칼럼니스트)
 

어린 김양수군은 저녁을 먹고 갔을까요, 아니면 그냥 집으로 갔을까요?

김양수의 <윤호와 나, 그리고 달리기> 제2화. 니가 내 마음을 알아? 편이 이어집니다. 기대해 주세요~!





김양수 (만화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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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생 1973년

데   뷔 1998년 만화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경   력 2005~2009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

           2008.02 네이버 웹툰 '생활의 참견' 연재

           1997~2009 월간 PAPER 기자

대표작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 

           <김양수의 음악의 재발견>, <시우는 행복해>

저   서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애니북스, 2005년),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한자 만화 교과서>(스콜라, 2007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1>(소담출판사, 2009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2>(소담출판사, 2010년)

사이트  미투데이 http://me2day.net/mup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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